현대자동차그룹 산하 대한민국의 자동차 기업.
현대자동차그룹의 모체이자 그룹을 대표하는 회사이며 더 나아가 삼성전자, LG전자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회사다.
본관은 서울 용산구 원효로 74로, 소위 원효사옥이라 부른다
로마자 표기는 Hyundai인데 미국, 영국 등의 영어권 국가들에서는 [현다이], [헌데이], [하이윤다이], [히윤다이], [하연다이], [하인대이], [휸다이] 등으로 불리며, 발음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를 모를 뿐더러, 나라별로 로마자를 읽는 방식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어명이 ‘현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ㅕ’와 ‘ㅐ’ 가 영어 화자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발음이라 정착되기가 힘들다.
현대자동차가 세계 시장에 안착한 2000년대 말 이후에는 그나마 국가별로 발음이 통일된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헌데이’, 영국은 ‘하이언다이’가 주로 통용되며,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히연데이’로 영어권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원어명에 가깝게 불러준다. 유럽 대륙에서는 여전히 중구난방이며, 프랑스에서는 ‘윤데이’가 대세다.
현대차 스스로도 발음이 중구난방인 것에 대해 고민이 많은지[4] “우리 이름 좀 제대로 불러주세요”라는 취지의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미국: 휸디, 현다이 등 온갖 발음이 중구난방으로 쓰이다가, 2009년 현대 제네시스가 북미 올해의 차에 선정되면서 자신감을 얻었는지 그해 슈퍼볼 광고를 통해 헌데이[hʌndeɪ]라는 발음을 홍보했다. 미국에서 고유 명사란 철자와 전혀 상관없이 장본인이 발음해 주기 원하는 대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대의 ‘ㅕ’를 도저히 미국인이 발음하지 못하니 맞든 틀리든 브랜드 네임을 통합하기라도 하는 차원에서 이런 발음을 홍보한 모양이다. 이후로는 이 발음이 정착해서 미주 광고 모델이나 저널리스트들은 다 헌데이라고 발음해준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현대를 ‘현대’라고 불러도 다른 사람들이 ‘헌데이’로 교정해주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한국어를 배우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머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한국인 배우자가 있거나 주한미군에서 복무했던 경력이 있는 등 한국과 인연이 있는 현지인들은 “현대”라고 부르는 경우도 간혹 있고, 한국어로 만들어지는 미국 내 한인 대상 광고에서는 당연히 그냥 ‘현대자동차’다.
영국: ‘하이윤다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으며, 현대차 영국법인에서도 계속 하이윤다이라고 하다가, 2022년 영국 내 시장점유율 10%를 넘어서면서 현대라고 불러달라는 광고를 냈다. 자막 버전
일본: 처음 진출했을 때는 HYUNDAI를 일본식으로 읽은 ヒュンダイ(휸다이)를 썼으나, 철수 이후 다시 재진출하면서 한국어 ‘현대’ 발음을 그대로 옮긴 ヒョンデ(횬데)를 사용한다.
놀랍게도 러시아와 몽골에서는 정확히 ‘현대’로 발음한다.
현대의 영문 명칭이 Hyundai인것을 두고 현대의 자동차 산업의 미국 진출이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늦었다 보니 일본의 혼다(Honda)와 비슷하게 발음되기 위해서 그렇게 지었다는 루머가 일부 있는데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현재 로마자 표기법대로라면 ‘ㅐ’발음을 ‘ae’로 표기하는 것이 표준이지만, 당시에는 ‘ai’로 표기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영어권 사람들에게 이 발음을 알려 주면 ai로 적는 것이 더 익숙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자문을 받아 영어 브랜드명을 만든 회사들이 대부분 ai로 표기를 해왔다.[5] 현대도 같은 기준으로 표기한 것 뿐이다. ‘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 연령대가 좀 있는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성을 Baek가 아닌 Paik로 표기하는 것도 당시에는 ‘ㅐ’를 ‘ai’로 적는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6] 참고로 ‘현대’를 현재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쓰면 Hyeondae.
그리고, 혼다라는 사명이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46년 10월 혼다기술연구소의 설립이었는데 현대라는 사명이 처음 등장한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이보다도 6개월 앞선 1946년 4월 설립으로 오히려 현대자동차가 6개월 더 먼저 빠르다. 따라서 현대의 영문 표기가 혼다와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서라거나 일본 기업처럼 보이기 위해서 라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부터 ‘현대(現代)’를 일본식 한자 독음으로 읽으면 ‘Hyundai’가 아니라 ‘Gendai’ 라고 읽는다.
결론적으로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이 정착하기 이전엔 이러한 표기를 배울 수단이 영어권 사람들에게 이 발음을 적어달라고 하거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방법이 유일했고 그러다 보니 -ai 로 적는 것이 사실상의 표준이었다. 현대의 한국어와 영문 표기법을 배우고 자란 세대에겐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쌀가게 ‘경일상회’ 주인이던 아산 정주영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3월에 인수하여 경기도 경성부 아현정(現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운영했던 아도써비스[7]라는 자동차 정비소를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8]
정주영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닦았다. 1940~1942년 당시 조선에서는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가지고 탈 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다. 당시에는 간단한 수리여도 수리일을 늘려서 공임을 더 받거나 일부러 부실한 수리를 해서 당시 정비소에 찾게 하려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 주인이 발이 묶여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게 고객을 위한 길이다’라며, 수리일은 아무리 큰 고장이라도 무조건 3일 이내, 다시 고장이 나지 않게 완벽하게 수리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대신 수리비용은 다른 공장에 비해 3~5배를 받았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자동차는 당시 부유층이나 소유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이들에게는 그저 수리비 돈 몇푼보다 빨리, 정확하게 수리하는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도 순조롭게 사업을 이어나갔다.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빨리 빨리”와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수익을 많이 냈다.[9][10]
그러나 초창기의 공장은 25일만에 불타 없어졌다. 새벽에 밤새도록 일을 하고 난 한 공원이 기름투성이 손을 씻기 위해 시너로 불을 지펴 물을 데우다가 그만 잘못해 불이 나고 말았다. # 그 이후 아도써비스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조그만한 공터에서 다시 공장을 세워 운영했다. 다행히도 그동안의 신뢰가 있었기에 고객들이 다시 찾아와 줬으며 상당히 흥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까지 일어나자 다시 사업이 어려웠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 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종로 5가에 있는 ‘일진공작회’로 정주영이 소유하던 아도써비스가 강제 흡수·합병되었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다. 이후 아도써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11]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중구 초동의 적산대지 등을 불하받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12]를 설립한다. 설립 직후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았으나 점점 수요가 늘었고, 이 회사를 현대토건사가 흡수해서 현대건설로 변모한다.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7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부터 시작한다. 1967년 12월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의 포드 모터 컴퍼니와 기술제휴를 체결했으나 포드와 소형차에 대한 협력에 문제가 생겨서 독자 모델 개발을 추진했지만 마땅한 기술제휴 회사를 구하지 못했다.[14]# 1970년대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도 기술제휴를 맺었다.[15]
마지막으로 찾아간 미쓰비시 자동차에서 소형차 개발을 도와주겠다고 1973년 기술제휴를 체결하며 차체와 엔진 변속기에 대한 생산기술을 얻었고, 1976년 1월 포니를 판매하게 되었다.#
1974년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세워 자동차 수리사업에도 진출했다.
이후 독자적인 모델의 생산을 위하여 자체개발을 시작했으며,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이었던 조지 턴불을 영입하고#[16] 19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산 5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같은 해엔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상장했다.
1975년 울산공장 준공 후 1976년 1월 대한민국 자동차공업의 자립화를 선언한 고유 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을 시작하여[17] 쏘나타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떠올랐고,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이 되었다.
1977년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는 정주영 회장을 만나 “현대가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포드든 제너럴 모터스든 원하는 조건으로 조립생산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다. 중동 건설에서도 현대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나 다름없고, 일생에 번 돈을 다 들여 실패하더라도 후대에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킬 디딤돌을 놓는다면 후회는 없다”며 거절했다.관련기사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결국 모든 압력을 무시하고 독자개발을 밀어붙였다.[18]
다만 독자개발은 현대에게 있어서도 사운을 건 도박과도 같은 일이였는데 동생 정인영은 정주영에게 독자 개발하려면 자기자본의 20~30배나 되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구한다 해도 타산이 맞으려면 최소 50,000대는 팔아야 한다. 그런데 1973년 대한민국 전체 자동차 판매량이 승용차, 버스, 트럭 다 합쳐봐야 겨우 18,000대를 넘길 정도였고 현대는 그중 겨우 4,000대를 팔았다. 내수 시장에서도 겨우 이정도 밖에 못파는게 현실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포니는 개발후 출시 전 부터 62개국 228곳의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엄청난 대박을 치게되고 정인영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우로 끝나게 된다.
1976년에 에콰도르에 포니 6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다. 1983년 캐나다 현지법인을 세워 해외 판매망 구축을 시작했고, 1985년에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 효문산업을 합병하고 1986년에 포니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북미 시장에 진출하여 1989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에 현지 공장을 세웠으나 잇따른 부진으로 1993년에 이 공장을 닫았고 1995년에는 전북 전주공장, 1996년에 충남 아산공장을 각각 세웠으며 같은 해에는 인도 현지 법인을 세웠다.
사실 이 기간 동안은 현대자동차의 사활이 걸린 기간이었다. 정주영은 1960년대에 현대자동차 내부에서 자동차 엔진을 자체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엔지니어들의 전문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정부에서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압박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여기서 중공업은 나중에 투자하여 키워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현대자동차를 택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체 엔진 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해외에서 GM에 근무중이던 이현순 박사[19]를 불러 엔진 자체 개발 연구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이때 정주영은 이현순 박사에게 자체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지원을 하겠다면서 설득했고 결국 이 박사가 이 제안을 수락하자 정회장은 연구소를 건설해주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소가 바로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이다. 물론 성공확률은 낮았고, 주변에서의 실패할 거라는 무시, 그리고 당시 미쓰비시에서 엔진 설계도를 사와서 제조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미쓰비시에서의 압박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현순 박사의 끈기있는 노력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자체 엔진을 개발해냈다. 프로젝트 내 이 엔진의 이름은 알파엔진이다. 이후 베타엔진, 감마엔진을 설계, 개발했다. 하지만 감마엔진은 당시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이 미쓰비시의 시리우스2엔진과 관련하여 계약을 맺는 바람에 설계만 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이후 이현순 박사는 감마엔진에서 성능을 더욱 향상시킨 세타엔진을 개발해냈고, 이 세타엔진은 바로 기아 로체와 NF소나타에 장착되게 된다. 이후 2008년까지 타우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 개발한 자동차 엔진의 자세한 목록은 하단 둘러보기 문단을 참고.